우리 근세사의 영웅! 단재 신채호 선생 사이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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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선생님의 북경 독립운동
글쓴이 : 공은솔 날짜 : 2017-05-06 (토) 13:23 조회 : 163
신채호 선생님이 북경에서 독립운동했을 당시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의 주소를 알수있을까요?

단재지킴이 2017-05-08 (월) 10:30

진스파앙제(錦什坊街)

1919년 초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샹하이로 떠나기 전까지 단재는 전통 선비의 기질을 연상케 하는 이 옛 거리에서 그전과는 달리 조용히 역사, 문학 저술과 논설 집필에 전념했다. 그 결과로 1910년대 후반기 꿈하늘, 一目大王鐵椎,利害,道德등 작품들로 창작활동의 고조기를 맞으며北京日報등 당시 베이징의 쟁쟁한 언론지에 논설을 실어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안성맞춤한 뚝심한 대범함을 고루 갖춘신식여성 박자혜(朴慈慧)와의 만남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西城區中部,阜成门内路南南起太平桥大街北至阜成门内大街

위도: 39° 55' 17.802" N 경도: 116° 21' 23.856" E

      

초떠우후우투웅(炒豆胡同)

1921년 단재는 주거지를 炒豆胡同으로 옮겼고 1922년 말 가족을 환국시키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天鼓의 창간과 맏아들 수범(秀範)의 출생이라는 두 가지 큰 기쁨을 만끽한다. 특히天鼓의 집필에는 각별한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잡지의 곳곳에 보이는晨報, 益世報,國報,新潮등 격동기의 베이징을 대표하는 간행물들에서 우리는 신문화운동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적극적인 사상적 모색을 시도했던 그의 정신사적 체험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군사통일주비(軍事統一籌備)에 참석하고 임정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성토문을 기초하고, 統一策進會發起趣旨書를 작성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리쓰쩌엉(李石曾),우쯔후이(吳稚暉), 리따쪼우(李大釗), 퍼엉위샤앙(馮玉祥) 등 그 시대를 주름잡던 중국의 쟁쟁한 인물들과의 만남도 이 때에 이루어졌다.

北京市東城區交道口南九条(北京东城区炒豆胡同)

위도: 39° 55' 58.206" N 경도: 116° 23' 49.23" E

      

따허이후후우투웅(大黑虎胡同)

1922년 가을경부터 1924년 초, 절에 들어가지 전까지 단재는 빈한이 깔린 이 허름한 작은 골목에서 궁핍하고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냈다. 天鼓의 폐간, 국민대표대회 준비 중 계속되는 진통은 단재를 혹심한 좌절과 회의에 빠지게 했다. 리따쪼우(李大釗)에게 쓴 편지는 그의 이런 울적하고 갑갑한 심경의 고백이다. 이 시기 단재는 리쓰쩌엉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아나키즘 운동의 동태를 빠르게 관측할 수 있었고 꾸러우 부근 삥마아쓰후우투웅(兵馬司胡同)에 개설되었던 에스페란토강습반에 참가하여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중국의 저명한 문학가이며 계몽선구자인 루쉰(魯迅), 쩌우쭤런(周作人) 형제와 러시아 시인이며 에스페란토학자 예로셍꼬, 대만 아나키스트 파안번랴앙(範本梁)등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 이 무렵 김원봉의 간청을 쾌락하고 샹하이로 향하며 19231朝鮮革命宣言을 세상에 내놓는다. 계속하여 역사 저술을 하는 한편 文藝界靑年參考, 大黑虎一夕談,人道主義可哀등 작품을 통해 문학관을 시대적, 문화적 환경의 변화와 사상적 요구에 맞추어 새롭게 정립했다. ‘

北京市西城區 旧鼓楼大街西侧(北京市北京西城区大黑虎胡同)

위도: 39° 56' 27.354" N 경도: 116° 23' 15.24" E

      

스떠엉안(石燈庵)

베이징의 혼잡한 사회정치적 상황으로 실천행동을 잠시 정지하고 저술활동에만 몰두하던 1918, 단재는 자신만의 조용한 사색의 공간을 가지기 위해 한동안 진스파앙쩨 가까이에 있는 스떠엉안(石燈庵)이라는 작은 암자에 우거하게 된다. 원나라 때 세워져서 처음에는 吉祥寺라 불리다가 그 땅 밑에서 석등을 파낸 후로 스떠엉안(石燈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 암자는 경치 좋은 타이핑후우(太平湖)를 끼고 있는 데다 다른 암자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줄곧 남승주지(男僧住持)였던 관계로 한때는紅樓夢의 저자 초우쉐에친(曹雪芹)을 비롯한 많은 문인학사들의 발길을 끌었다 한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이르러 번화했던 고찰의 모습은 사라지고 찾는 사람도 갈수록 뜸해졌다. 그렇게 되자 당시의 주지였던 웨처언(越塵)스님은 한가한 방들을 매달 40-50원에 임대하여 암자의 유지비를 마련했는데 그 때문에 단재도 쉽게 거기에 우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의 미술대가 치바이쓰(齊白石)1920년에 이 암자에 머물렀었다.

北京市西城區佟麟阁路街西石灯胡同 北京电视技术研究所内

위도: 39° 54' 0.51" N 경도: 116° 21' 32.928"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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